140만 평방미터로 수용면적이 가장 넓은 프리마 포르테 공동묘지를 비롯, 오스티아 안티카(13715평방미터), 마카레세(10200평방미터), 카스텔 디 귀도(2310평방미터) 등이다 . 이 4군데 공동묘지에서 받는 매장이나 화장가격은 모두 단일화되어 있다.
서로 다른 조례를 적용하고 있는 자치단체지만 가격만은 하나로 묶어 이용자들에게 그만큼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것. 이 가운데 로마 북쪽에 자리잡은 프리마포르테 공동묘지는 1980년에 개발을 끝낸 초대형 현대식 공동묘지로 특히 아파트식 대규모 납골당이 즐비해 멀리서 보면 마치 아파트 단지처럼 보인다.
얼핏 한국의 과학기술단지앞에 와 있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청결한 것은 물론 황색페인트로 말끔히 단장한 30여동의 5층짜리 납골당엔 이미 수만기의 납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주로 서민층이 이용하고 있으나 주위에는 가족단위 납골당이 즐비하다. 시립묘지가 포화상태에 이른 지금 대부분의 로마시민이 죽어서 이곳에 묻힌다.
우선 프리마포르테에 들어서면 화장시설이 눈에 들어 온다. 묘원외곽의 가장 높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화장을 마친 납골들은 유족들에 의해 화장터 중앙에 설치한 100여m나 되는 긴 계단으로 한 걸음씩 운구되어 납골당에 안치된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지만 유럽에서 화장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74년 영국 빅토리아여왕의 주치의인 헨리 톰슨경이 <화장-육신의 사후 처리>를 출간 하면서 부터로 알려졌다.
그는 매장 풍습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을 규합, 영국화장협회를 조직했다.
영국에서는 톰슨경의 노력에 힘입어 1884년에 비로소 화장이 합법적이라는 판결을 받았고, 이는 유럽전역으로 화장이 확대되기 시작한 계기였다. 의외로 화장에 대한 반대의견은 법조계에 남아 있었다.
화장이 자칫 범죄를 은폐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도 검시기술의 발달로 설득력을 잃었고, 오늘날에는 유럽 거의 전역에서 화장이 보편화되는 추세다. 이같은 배경 외에도 로마시민들은 원래 기원전부터 화장문화를 선호했다.
고대 로마제국시절 화장을 대중화한 것은 아우구스투스황제였다. 기원전 44년 시저가 살해된 후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 야심스런 안토니우스장군을 따돌리고 황제에 즉위, 아우구스투스로 칭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견제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는 27세때인 기원전 36년에 자신이 묻힐 묘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8년, 높이 40m의 거대한 묘가 완성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묻히기 전에 먼저 세상을 뜬 가족들을 묻어야 했다.
사위가 된 조카 마르케르스, 충신 아그릿파, 손자인 루키우스와 가이우스, 양자 티베리우스의 동생 도르두스 등이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이었다. 정작 그가 기원후 13년 사망했을 때 로마광장에 급조된 화장터의 장작위에 유해가 안치됐고, 장군들은 횃불로 불을 질렀다.
기사들은 맨발에 흰 속옷만 걸치고 화장터로 걸어 들어가 유골을 주위 능묘에 안치함으로서 장례를 끝냈다. 이때부터 화장은 로마인들에게 용맹스럽게 생을 마감하는 죽음의 의식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화장문화의 복원은 이처럼 전통적 장묘문화로의 복귀인 셈이다. 로마시는 1979년 10월 로마시립묘지법을 공표한데 이어 1990년 9월10일에는 <사망자 관할 시경>을 발족하는 등 망자들의 안식처를 정부 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